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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노동 타파, 사실상 포기? '맹탕' 노동정책 나온 이유는…[노동:판]



경제 일반

    장시간 노동 타파, 사실상 포기? '맹탕' 노동정책 나온 이유는…[노동:판]

    편집자 주

    우리는 일합니다.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오늘도 일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쉼없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모든 노동자에게, 일터를 찾은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판 깔아봅니다.

    윤석열 대통령. 박종민 기자윤석열 대통령. 박종민 기자
    ▶첫 공개된 尹정부 노동정책 뜯어보니 …
    윤석열 정부의 첫 노동정책 방향이 공개됐습니다. 장시간 노동의 문턱을 낮추도록 연장근로·유연근무제 단위기간을 확대하고, 직무급제를 도입하기 위한 논의 테이블을 열겠다네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 주52시간제를 정착시켰던 노동시간 단축, 장시간 노동 관행 타파라는 목표는 벌써 잊은 걸까요? 노동자 건강과 소득 보전을 위한 대책은 아예 잘 보이지도 않는군요. 더구나 과거 정부들마다 반복됐던 직무급제 도입을 둘러싼 갈등은 이번에도 되풀이될까요? 한편 알맹이 빼놓은 과제들로 채워진 개편안, 여소야대 국회와 노동계의 반발을 고려해 밑바닥부터 다지며 '중단 없는 개혁'을 이루려는 '큰 그림'으로 읽히는데요. 과연 정부가 야당과 노동계를 설득하고 화폭을 채워넣을 수 있을까요?

    윤석열 정부가 집권 후 첫 노동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대폭 확대해 장시간 노동의 문턱을 낮추고, 연공성 임금체계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옮겨가도록 판을 깔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노동계의 반대에 직면한데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관련 법 개정도 가능성이 높지 않아 추진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예상된다.

    연장근로 단위 '1주→1개월'로 장시간 노동 허용…직무급제 논의 테이블도 마련키로

    고용노동부 이정식 장관이 지난 23일 공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에는 우선 추진과제로 '근로시간 제도'와 '임금체계'의 개편 작업이 지목됐다.

    전자는 한 마디로 '유연근무제를 확대해 일 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도록 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방안은 1주일 12시간으로 규정된 연장 근로시간을 '1개월 단위'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흔히 주52시간제로 널리 알려졌지만, 근로기준법에 정한 노동시간은 1일 8시간, 즉 1주일 40시간이다. 여기에 1주일 기준 12시간의 연장근로가 추가로 허용돼 이를 합쳐 1주일에 최대 52시간씩 일할 수 있다.

    1주일을 단위로 결정된 12시간의 연장근로시간을 월 단위로 바꿀 경우, 30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52.1시간에 달한다. 이렇게 기준을 월 단위로 바꾸기만 해도, 더 손쉽게 '몰아서 오랫동안' 일할 길이 열린다. 예를 들어 한 달 중 첫 2주 동안 일감이 아무리 몰려도 예전에는 12시간씩 총 24시간만 연장근로가 가능했지만, 월 단위로 계산하면 한 달 치의 연장근로를 한꺼번에 사용할 수도 있는 식이다.

    이를 토대로 정부는 업무량이 많을 때 초과근무를 하는 대신, 업무량이 적을 때 그만큼 휴가 등을 사용하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도입방안'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주52시간제를 도입하면서 근로시간 정산기간 단위를 기존 1개월에서 연구개발에 한해 3개월로 늘렸던 선택적 근로시간제도 정산기간을 확대할 방침이다.

    연장근로의 틀을 뒤흔들 과제를 제시한 근로시간 제도와 달리 임금체계 개편안은 연공성 임금 체계를 대체할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를 목표로 내걸면서도 '의견 수렴'과 '인프라 구축'에 초점을 맞춰 소개됐다.

    대표적으로 다음 달 출범 예정인 전문가 기구 '미래 노동시장 연구회'를 통해 오는 10월 입법·정책과제 권고안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이다. 또 2024년까지 미국처럼 기업들의 각 직무별 임금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도 구축하기로 했다.

    "노동시간 단축 포기한 정부, 노동자 건강·소득 보전 대책도 없어"

    이에 대해 양대노총은 노동부가 경영계의 요구사항만 편협하게 받아들였다며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 장관의 '친정'인 한국노총은 이번 발표 내용을 '사용자단체 요구에 따른 편파적 법·제도 개악 방안'이라고 비판했다. 또 민주노총은 "주52시간제를 무력화하고 노동시간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도록 노동시간 유연화 확대, 사용자의 성과평가권한과 임금저하를 위한 직무성과급제의 확대"라고 요약했다.

    노동계 비판을 정리해보면, 이번 추진과제 중 노동시간 제도의 경우 관련 노동시간 단축과 장시간 노동관행 철폐라는 기존 정책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세웠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노동시간의 유연화에 대한 방안만 거론될 뿐, 전체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대책은 따로 제시되지 않았다. 더구나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수록 일을 몰아서 사용하면서 장시간 노동 관행이 다시 기승을 부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 다른 문제는 유연근무가 확대되면서 나타날 부작용에 대한 해법이 빠졌다는 점이다. 장시간 노동에 빠질 수 없는 노동자 건강 문제의 경우 "근로자 건강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건강보호조치 방안도 함께 마련하겠다"는 언급에 그쳤다.

    이에 대해 정부는 기존의 1주 12시간의 연장근로 한도는 원칙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장시간 근무할 경우 하루의 근무 후 다음날 근무를 시작하기 전 연속된 11시간 이상의 휴식 시간을 제공하도록 노동자 건강 보호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명하고 있다.

    금속노조가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12번 출구 앞에서 노동중심 산업전환 노정교섭 쟁취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갖고 용산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금속노조가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12번 출구 앞에서 노동중심 산업전환 노정교섭 쟁취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갖고 용산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하지만 대구대학교 이승협 사회학과 교수는 "단기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로 상정해 계산하더라도, 기존 1주일의 52시간에 탄력근로제로 연장할 수 있는 12시간을 더해 1주 64시간씩 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실상 주52시간제의 의미가 하나도 없어지게 만들 제도"라고 우려했다.

    그동안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 관행에 동조했던 가장 큰 이유인 연장근로수당 문제는 아예 거론도 되지 않았다. 예컨대 '근로시간 저축계좌제'에서 '당겨서' 쓴 초과근로시간의 임금에 대해 지금의 연장근로수당처럼 1.5배의 가산금을 보장하느냐 여부에 따라서는 자칫 똑같이 일하고도 수입만 줄어드는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

    집권 후 첫 노동정책 발표인데 '속 빈 강정'…그 이유는?

    한편 이번 대책 발표에서 눈에 띄는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거의 모든 과제들이 '검토'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발표내용의 핵심인 연장 근로시간의 단위 조정의 경우 "합리적인 총량 관리단위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표현했고,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 "세부적인 쟁점사항에 대해 면밀히 살펴제도를 설계하겠다"고 미래의 과제로 맡겨뒀다.

    공약 등에서 1년까지 단위기간을 늘리겠다던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적정 정산기간 확대 등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목표치를 내놓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연장근로 적용제외 특례업종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스타트업‧전문직에 대해서도 "근로자·사용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이 무엇인지 깊이 검토하겠다"는 알맹이를 빼놓은 답을 내놓았다.

    임금체계 개편에 대해서는 아예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개편‧확산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제를 적극 검토하겠다", "정책적‧제도적 해결과제는 없는지도 함께 살피겠다", "고령자 계속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임금피크제, 재고용 등에 대한 제도개선 과제도 함께 검토할 계획"이라며 구체적인 청사진 하나 없이 '검토' 입장을 반복해서 드러냈다.

    결국 '미래 노동시장 연구회'와 '한국형 직무별 임금정보시스템' 구축 계획을 제외하면 '타임테이블'과 목표를 명쾌하게 밝힌 과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에 대해 이 장관은 "(임금체계의 경우)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연구회를 통해 개혁 방안을 만들어야 하니까 당연히 저희가 입장을 내는 것은 연구회의 전문적인 운영을 침해하는 것 아닌가"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미 대선 공약, 국정과제 등을 통해 윤곽이 드러난 내용임에도, 정권 교체 후 처음으로 내놓는 정책 과제의 내용을 주무부처가 책임지고 밝히지 않고 전문가 기구에 공을 넘기거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미루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노동부 장관이었던 김영주 장관이 취임 사흘 만에 발표했던 산업재해 감소방안을 다시 꺼내보면 "(원청이 산재예방의 의무를) 위반시 처벌도 하청과 동일하게 처벌한다",  "산업안전보건관리비를 조선업종 표준하도급계약서에도 반영한다" 등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해 정부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소야대 국회·노동계 반대 고려한 고육지책? "정부 입장 공식 선언한 것 자체의 의미도 주목해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과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차적으로 정부의 이처럼 신중한 태도의 배경에는, 이번에 발표된 과제들이 정부가 단독으로 결과물을 만들기 어려운 현실이 반증됐다고도 볼 수 있다.

    연장근로나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바꾸는 일은 근로기준법 개정사항이다. 또 연장근로 단위를 바꾸지 못하면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 사실상 활용할 수가 없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주52시간제를 도입했던 더불어민주당이 법 개정에 적극 나서기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동계가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로의 개편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는 이미 과거 정부들의 실패 사례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공공기관 개혁과제로 성과연봉제 도입을 밀어붙였다가 노동계의 대대적인 반발에 직면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직무급제'로 수위를 낮춰 시도했지만, 역시 공공노조의 반대에 사실상 포기했다.

    이처럼 여소야대 국면인 국회와 보수 정권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채 노동계를 설득해야 하는 조건을 고려하면, 당장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한 '고육지책'으로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장관은 이른바 '킬 이슈'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과거 박근혜 정부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킬 이슈'인 해고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노사 간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 직장점거 금지, 부당노동행위 인정 등"을 킬 이슈의 사례로 들며 "이런 부분들은 정말 킬 이슈라고 볼 수 있는데 한꺼번에 손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9월 한국노총과 104개 항목을 한번에 합의하는 '노사정 대타협'을 추진했지만, 파견법 개정안과 양대지침을 무리하게 포함시키려다 노정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반면 문재인 정부의 경우 집권 직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집권 3년 내 최저임금 1만원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다른 노동 정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임기 내내 반대 여론에 시달렸다.

    노동부가 이번 정책 방향을 발표하며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쳐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중단 없는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것도 이러한 과거 정부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와 명분 쌓기에 먼저 주력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다만 이에 대해 이승협 교수는 "현실적으로 실제 노동시간, 임금제도가 당장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박근혜, 문재인 정부 시절 '킬 이슈'가 다른 정책까지 속도를 내지 못하게 발목을 잡은 '블랙홀'이 된 이유는 오히려 당장 실행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중요한 지점은 정부가 사용자 중심으로 노동정책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공식 선언했다는 것"이라며 "당장 결과를 내놓기 어려운 현실을 알면서도 정책 테이블의 카드로 올린 것 자체가 노동계에 대한 일종의 '협박'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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